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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트

문왕과 강태공

강태공과 문왕

주나라 문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한 마리의 짐승도 못 잡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실망한 문왕이 강가를 지나가는데 웬 노인이 낚시질을 하고 있어 

문왕이 노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낚시를 즐겨 하시나 봅니다!!

그러자 노인의 대답이 "일을 함에 있어 군자는 뜻의 얻음을 즐기고"
 
소인은 이익의 얻음을 즐깁니다. 

낚시질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며 

지금 저는 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눈에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 챈 문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낚시질하는 것이 정치의 무엇과 비슷한지 말해줄 수 있소?
 
하자...

노인이 다시 답했습니다. 

낚시에는 세 가지의 심오한 

이치가 숨어 있으니... 

첫째는 미끼로써 고기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는 좋은 먹이로써 더욱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는 법인데 

이는 인재에게 녹을 많이 주면 줄수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종류에 따라 요리법이 다르듯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의 나이 72세에 처음 문왕을 만났으며 문왕은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하며 

국사로 봉했으니 그가 바로 세월을 낚던 그 유명한 "강태공"이었습니다.


[문왕과 강태공]


※ <참고자료>

1.강 태공의 휘는 강 상입니다.
강상은 염제신농황제(炎帝神農皇帝) 51세손이요,백이(伯夷) 
36세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춘추전국 시기의 ()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 2월 겨울, 은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 5천의 군사로 

72만의 은나라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

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제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공작(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왕좌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수불반분'

(한 번 엎지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 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났는데, 이후 강태공이 성공했을 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후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 해주겠다고 했다

, 한 번 떠난 마음은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 연세는 139세였다

의관을 서주(西周)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이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周易)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중국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왕으로 인정하였다.

2.文王은 呂尙의 보좌를 받아 덕을 쌓고 선행을 거듭하였으며 

훌륭한 인물들을 찾아나서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제후들이 그를 따랐으며 명망이 널리 퍼졌다

밖으로 정벌에 나서 우선 서쪽의 견융족을 정벌하였고 

다시 밀수(密須: 감숙성 영대지역)를 정벌했으며, 黎國 등을 정벌하였다.

주 문왕이 태공에게 어떻게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태공이 답하기를 「왕자의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부유하고 패자(覇者)국에서는 관리들만 부유하며, 겨우 먹고사는 근근한 나라에서는 사대부들만 부유해지는 법입니다

또한 무도한 나라에서는 국고만 가득차게 됩니다

자고로 위가 새면 아래도 샌다고 합니다」

문왕이 지당한 말이라 여기고 즉시 창고를 열어 돈과 식량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주나라 국력은 날로 흥성해지고 세력은 더욱 뻗어나가 천하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왕이 죽고 무왕이 뒤를 잇자 여상이 사()가 되고

(사상보 師尙父; 스승으로 존경하고 아버지로 모신다는 뜻

주공 단()이 보좌하였다. 필공의 무리들이 왕을 도와 문왕의 창업을 육성했다

여상이 보좌하여 맹진(盟津)에서 제후들과 회합하여 상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키로 하여 목야(牧野)에서 紂王의 군대와 부딪쳤다. 태공이 선제공격을 하여 쳐들어가니 주왕은 대패하여 스스로 몸에 불에 뛰어 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로서 상나라가 망하고 武王이 周나라를 세웠다.

周 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3일째 되는 날 태공은 무왕에게 단서(丹書)를 강술하여 인애 치국의 도에 대해 말하였고 후에 무왕은 태공을 제()나라에 봉했다.

성왕 때 여태공은 주공을 도와 무경(武庚)의 난을 평정했다. 성왕은 태공의 제나라로 하여금 죄를 짓는 제후들을 징벌토록 명하였으며 이로서 제나라는 제후국중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여태공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상벌을 분명히 하였으며 어업을 발전시키고 소금생산과 수공업을 장려하였다.

(얼마 가지 아니하여) 제나라는 제후국중 가장 번성하였다.

전설은 여태공이 백 세가 넘게 살았다 하며 호경에 묻혔다.

 

[출처:위키백과,Daum Tip]